나는 보는 것을 좋아한다.
'보다'라는 단어의 장점은 많은 매체와 감각의 대상들을 목적어로 쓸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영화도, 드라마도, TV쇼도, 스포츠도, 소설도, 시도, 연극도, 전시회도, 사설이나 에세이도 모두 '보는 것'이다. 심지어 음악도 본다는 단어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수많은 매체 속 컨텐츠들을 향유하는 것은 전적으로 현대의 산물들 덕택이다. (구텐베르크, 베어드, 뤼미에르, 유튜브 만세!)
수많은 봄 직한 이야기와 그를 담아낼 형식들이 즐비한 세상에 태어난 것은 개인적으로 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 태어난 탓에 오는 부작용도 있다. 바로 선택장애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이야기는 어떤 매체를 막론하고 시간을 소비하여 맥락을 들어야 하는 탓에, 기껏 고른 이야기를 보고 있을 때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미처 보지 못한 것의 기회비용이 더 크진 않을까 속으로 전전긍긍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과정이 중첩돼서 피로감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직접 고르기보다는 "아무거나"를 외치면서 선택을 남에게 넘겨버리고, 재밌는 것을 미리 찾아 놓은 누군가의 검증에 기대고 싶어진다. 서점에 베스트셀러나 특정 명사의 추천작이 전시되어 있고, 극장에는 박스 오피스가, TV는 시청률과 화제성이, 유튜브에는 알고리즘이 있는 본질도 우리의 선택지를 좁혀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검증받고 엄선된 이야기들은 각광 받는다. 나 역시 선택의 고민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그들의 존재를 만끽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면 나는 조명받지 않는 이야기들의 말들에 더 이목이 쏠린다. 사실 둘 사이에 그렇게까지 대비되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성과에 비하면 크지 않은 격차일 때가 많다. 때로는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 매력적이기까지 한다. 그런 작품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묻히는 건 나 같은 소비자의 게으름도 한몫할 것이다.
설혹 누군가가 이 부분만을 보고 반골 정신으로 포장해 준다면, 감사하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보다는 나의 소심함과 두려움에 더 가깝다.
인생도처유상수.¹⁾
지금은 사라진 모 TV쇼에서 유홍준 전 청장께서 한 이 말을 들은 이래로 나는 이 말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막연히 가지고 있던 나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단 7글자로 설명한 것처럼 들렸던 탓인 걸까.
삶과 비례하여 견문이 넓어지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식견을 쌓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타인의 결과물과 나의 습작 간에 비교질을 했다. 나의 습작은 어쩌면 당연히도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어떤 것들은 나의 기억과 주관을 따라 왜곡되기도 했다. 밝고 빛나는 화제에서 겨룬다면 그 차이가 명백할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서 나는 나의 글 소재들을 화젯거리에서 가급적 떼어내 그늘과 응달로 밀어댔다. 그곳에서 본 것들은 나의 '아무거나'가 되었다.
그 아무거나를 한 번 풀어 보고자 한다. 비록 글 자체는 나의 주관적 감상이 주를 이룰 것이므로, 전달 과정에서 다소간의 왜곡이나 과장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보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로 여긴다면 일단 그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피드백을 쎄게 받아 가도, 그 역시 배우는 거겠지.(근데 뭐부터 한담…)
각주
¹⁾ 人生到處有上手.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6권 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