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진동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 총칼로 무장한 일본인 교사들이 가운데 앉아있다. 창원교육지원청.
불령선인으로 불리며 이름과 이웃 다음으로 뺏길 것을 추스르던 이들은 나의 증조부 뻘이다. 무명의 고독함 끝에서 그들은 자식에게 조국을 물려주었다. 나라 잃은 백성이 낳은 배곯은 국민들은 지모(地母)를 박차고 났다. 포대기에 업혀 독재자를 피한 동생은 상아탑을 딛고 독재자에 맞선 형을 두었다. 위대한 유산은 사그라들긴커녕 공장의 연료가 됐다. 우리가 아는 모든 1세대 기업가들의 혜안은 이 시대정신에 빚을 졌다. 끝내 한 방울의 젊음이, 그러니까 대구에서 스물셋 청년이 연소(燃燒)했을 때 비로소 내 아버지는 일요일을 물려받았다.
나는 교정에서 화약 냄새를 맡은 일이 없다. 아버지가 풀섶을 휘적였을 70년대 후반, 영상업계의 경쟁 심화는 뜻밖에 '광주 비디오'의 산파가 됐다. 인간성의 황무지는 고스란히 녹화되어 우리에게 잔인한 5월을 남겼다. 다만 이제는 시대의 금서(禁書)도 청춘이 펼치면 항해할 만한 바다가 된다. 칠흑 같은 두려움 속에서도 옳은 것에 대한 설렘은 관측 가능하다. 분노로 벼린 지성은 어느덧 바짝 날이 서 압제를 가르고 나아갔다. 그것이 우리의 불완전함에도 의미 있는 처음이었다. 이 모든 전사(前史)를 그러안고 나는 고민하는 초년에 있다.
나 역시 내 자식 세대의 최대 의제가 어느 하루의 저녁 메뉴와 같은 별 볼 일 없는 것이었으면 한다. 그러한 안온함이 자칫 내 자식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면, 적어도 내 목말 위에서 내가 했던 것보다 한 뼘 더 높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계엄군. 2024년 12월 4일. 연합뉴스.
이번 계엄은 거의 내 아버지의 나이에 가까운 시간을 회돌아왔다.
역사는 반성이다. 지나온 줄로 알았던 길을 되돌아간다. 어떤 정보를 금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더 이상 나라 공관이 아니라 개인의 철학이다. 우리가 약자를 지나치게 만들고도 그 모든 것에 무뎌지게 할 최적의 훈련법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오월광주를 꾸준히 조롱하는 것이다. 딸뻘의 아르바이트생이 최저시급을 요구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용기 있는 일이다. 기업가들의 자서전이 늘어선 자기계발서 매대는 마치 만신전(萬神殿) 같다. 자유의 껍데기 위를 헤매는 자들에게 불순분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사사(私事)는 반성과 책임이다. 조선일보가 대선 과정에서 벌인 숱한 견강부회를 나는 흥미롭게 관전했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윤석열 캠프에 속속 합류했을 때도 진실의 굳기를 믿었다. 고용주의 입장을 고용주 본인보다 더 잘 이해해 주는, 과적화(overfitting)된 임금 노동자 지인의 푸념에는 답하지 않았다. 자유연애'시장'에서 타국 여성만을 택하겠다면서도 '한녀' 욕하는 글과 국산 그라비아 화보 둘 모두에 공평하게 500개씩의 추천을 누르는 모 공산주의자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면서는 잠깐 떫고 말았다. 어련하겠나?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 대선 날을 맞았다. 기존에 갖고 있던 인과의 고리만 걸치고 투표장에 나섰다. 기술이 엄호하는 각자의 피드 속에서 연대라는 선택지는 새까맣게 실전되었다. 그저 나와 같은 사사들이 모이면 보란 듯 역사가 될 줄 알았다.
나는 말하자면 사슬 갑옷을 입고 나왔지만 정작 벌어진 건 파자마 파티였다. 드레스 코드를 틀린 것이다. 나는 둔중한데 그들은 편해 보였다. 파자마를 입고 나온 사람이 더 많으니 방도가 없다.¹⁾ 말하지 않는 법을 빨리 배워둔 것이 잘못이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새벽이 끝나고 나의 힘겨운 첫 마디에 내 책임이 담겼었을 때, 그들이 떠벌린 백 마디 말에는 자신들의 책임이 없었다.
그의 임기는 곧 나의 성찰의 시간이었다.
무지가 악의가 될 수 있다는 것에조차 무지한 순수한 악의를, 윤석열은 다만 표상할 뿐이다. 이 지적 태만과 도덕적 파산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견조하다. 그들은 국가 폭력의 끝인 불법 계엄이 자행된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끝까지 말하는 법을 모르겠다면, 다만 나는 글로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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