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광주를 다룬 유명한 책 중에 시인 박노해가 저술한 『윤상원 평전』이 있다. 윤상원은 오월 항쟁 때 시민군의 대변인을 맡은 사람이다. 사노맹의 간부를 지낸 노동운동가 출신 문예인 박노해는 윤상원을 숭고한 민주투사로 각색한다. 윤상원은 마치 한국의 레닌처럼 묘사된다. 시민들은 압제적인 군사정권에 맞서 일사불란하게 무장혁명을 준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군상으로서 그려진다. 박노해는 그 경력으로나 성향으로나 아마도 그렇게 묘사함으로써 오월광주가 정당하게 평가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오월광주는 그렇게까지 '숭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월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는 하나같이 소시민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뿐이었다는 것이다. 군상극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개성을 가지고 활동하며, 숭고한 노동해방이나 조국통일의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주의적이고 노동·민중문학적인 서사와 달리 오월광주에서는 그러한 점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역사학자 그리고 유가족들의 설명이다. 무장봉기를 하려던 것도, 숭고한 목적을 가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살기 위해 총을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들에서 숭고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많았다.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의 서두에서 소설을 집필한 계기가 용산참사라고 적었다. 09년 용산 4구역 참사에서 80년 광주를 보았다는 것이다. 크고 많은 논란이 있지만 용산 참사 때 빌딩에 올라간 사람들은 민주투사나 거창한 해방가가 아니었다. 용산 외곽에 세를 들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정당에 소속된 것도, 어떤 지령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 건물에 올라간 사람들은 지금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지도 않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조용히 용산역 앞에서 노상을 하거나, 용산전자상가에서 일용직으로 뛰곤 한다. 그렇다. 그들은 투사라기보다는 살아 움직이고자 하는 생명체에 가까웠다.
5월 18일은 유성기업 투쟁의 시작일이기도 하다. 2011년 5월 18일 시작된 유성 투쟁은 역시나 거창한 노동해방 운동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12시간이나 되는 격무에 시달렸고, 요구는 그저 "잠 좀 자자!"일 뿐이었다. 노동해방, 사회주의혁명 같은 것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파업에 돌입하자 원청인 현대자동차는 노조파괴 공작원을 투입해 사업장을 점거했고, 보수언론과 대통령은 현대차의 편을 들었다. 10년에 걸친 투쟁 끝에 유성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많은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에서 그들의 승리를 '위대한 여정의 종착'이라고 칭찬했지만, 사실은 조금 웃긴 일이다. 하루에 12시간 일하는 걸 8시간 일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이런 많은 일이 일어나다니. 일반인의 일반적 요구를 위한 일반적인 싸움일 뿐인 것을.
그렇지만 그러한 행위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숭고함을 발견할 수 있다. 새가 나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다. 인간은 새가 나는 것에 숭고하고 거창한 시어(詩語)를 붙이곤 하지만, 사실은 새는 물고기를 잡고 도래지를 거쳐 새끼를 낳기 위해 날개를 펄럭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는 몇 달을 거쳐 지구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며 바람을 거스르고 바다를 건넌다. 그러한 행위 자체에서 우리는 새가 살아남기 위해 꿈틀거리는 그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오월광주의 시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월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민주주의나 사회변혁을 위해 투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일부는 그랬지만, 대다수는 5월 18일 이루어진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놀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것에 불과했다. 광주역 앞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어주던 아주머니들이나 시신을 나르던 대학생들, 병원에서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던 목회자들은 투사라기보다는 인간, 시민이었다. 오늘날 기억되는 것은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광주에는 그렇게 일반적으로 살아가다가 일반적인 요구를 위해 일어난 일반적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 것에서 우리는 숭고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어쩌면 죽음을 불사할지도 모르는 순간에, 살아남기 위해 서로 뭉친 것이다. 인간 역사의 모든 위대한 여로는 그러한 방식으로 시작되어 왔다. 그 어떠한 목적도 없이 단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는 것에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움이 있다. 그들이 용감하거나, 뜻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그저 나와 남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태원 참사나 채상병 사건도 비슷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는 어떠한 혁명이나 투쟁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으로서, 혹은 생명체로서 그 자체로서 해야 하는 존엄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만큼이나, 인간의 정신만큼이나 존엄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오월 광주시민들과 이태원 유가족은 모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수천수백만 개의 광주를 볼 수 있다. 장소가 어디든 시대가 어디든 스스로의 존엄함을 위해,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위해 싸우는 모든 자들이 광주의 시민들이다.
그러한 많은 죽음, 그러한 숭고한 인간성, 그리고 뒤따르는 자의 분투 때문에 영원한 부활을 생각하게 되는,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잊을 수 없는 찔레꽃 피는 오월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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