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화관에 가서 〈범죄도시4〉를 보았다. 좋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재미도 있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코로나 시대 이후 침체된 한국 영화에 자본금을 계속 불어넣는 한국 영화의 희망 중 하나로, 영화 외적으로는 긍정적 효과를 주고 있음이 명확하다. 그러나 〈범죄도시〉가 이렇게까지 흥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심장하다고 볼만하다. 왜냐하면 문화는 그 시대의 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플롯은 대체로 단순한데, 어떠한 악당이 존재하고, 이 악당이 사회적인 약자들을 괴롭히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등의 나쁜 행동을 한다. 그러면 정의로운 검찰이 나서서 범죄자들을 쓸어버린다. 그렇다고 공권력이 무작정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도 아니다. 기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권력은 대체로 무능력하다. 한명 한명의 경찰만이 개인적으로 정의로울 뿐이다. 또한 공권력의 집행은 법적 절차를 거치긴 했지만 이는 형식적일 뿐이며, 대부분의 문제 해결은 폭력으로 이루어진다. 관객은 이러한 명확한 선-악의 구도,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 결국은 거악(巨惡)도 더 큰 힘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하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플롯을 여러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영화는 전통적으로 권력과 부를 지니고 힘없는 서민을 괴롭히는 악당 대 정의로운 검사 혹은 경찰의 대립 구도를 그려왔다. 대표적으로 〈베테랑〉이 그러하며, 〈검사외전〉도 그렇다. 두 영화가 얼마나 흥행몰이했는지를 상기한다면, 한국인들이 이런 식의 플롯을 좋아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인들은 정의로운 공권력의 영웅을 갈구한다.
여기서 국민을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국가에서도 민중은 영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영웅이라는 기호를, 주류 정치권과 지배계급 세력이 어떻게 이용하는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공권력을 통한 악의 제거를 갈구하는 한국인의 기저에 깔린 욕망이 정치적으로 주형된 형태가 현재의 검찰 신화라는 것이다. 경찰이 주인공인 〈범죄도시〉보다는 검사가 주인공인 〈검사외전〉을 통해 설명해 보겠다.
배우 황정민이 분한 〈검사외전〉의 주인공 변재욱은 작중 스스로를 '폭력 검사'라 자칭한다. 스틸 작가 조원진.
〈검사외전〉의 주인공은 정의로운 검사이다. 합법적으로 범죄자들을 때리고 싶어서 검사가 되었다고 스스로 말한다. 여기서 폭력이 정당화됨을 알 수 있다. 한국은 법치 국가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요구한다. 그 누구도 감옥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민간인으로서 폭행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설령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그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검사외전〉은 악인을 그 어떠한 인정도 가지지 않는 완전무결한 거악으로 그려내면서, 이러한 '회색지대'를 간단하게 제거한다. 〈검사외전〉의 주인공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이때의 배후 세력은 선배 검사이다. 선배 검사는 토건업자는 물론 정치권과도 연이 있어 포항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역시 재미있다. 한국인이 정치와 권력, 자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저의 불신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그놈이 그놈이고, 모두 서민 등골 처먹는다"라는 정치 혐오를 드러낸다.
주인공은 결국 이러한 거대한 악에 맞서 하나하나 진실을 밝혀나가며, 끝내는 자신을 옥에 가둔 선배 검사를 몰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다시피, 영웅은 언제나 인기가 좋은 주제이다. 거대한 악에 핍박받으면서, 사회로부터 배제된 이가 영웅이 되어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독고다이, 검사외전이다. 이렇듯, 우리는 〈검사외전〉이라는 영화에서 여러 가지의 문화적 코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선과 악의 단순화, 범죄혐의자에 대한 유죄추정, 사적제재의 정당화, 정치권력에 대한 끝 없는 혐오와 불신, 악을 이기는 정의로운 영웅에 대한 숭상 등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코드가 결과적으로 현재 윤석열과 한동훈이라는 두 기괴한 정치인을 구성한 코드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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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단순화 → 조국이라는 거대한 권력형 악에 맞선 선한 검사 윤석열. 이재명에 대한 악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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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추정의 원칙 → 선거유세 중 한동훈의 끝 없는 '범죄세력'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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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제재의 정당화 → 한동훈의 '쓰레기 청소' 발언, 윤석열의 정치보복에 대한 국민의힘 지지자들의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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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에 대한 불신 → 이재명, 조국에 대한 악마화. 양비론으로 넘어간 상당수의 국힘 지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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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이기는 정의로운 영웅에 대한 숭상 → 윤석열과 한동훈이 부상한 원인 그 자체.
이러한 단순한 비교가 아니더라도, 현재의 검찰이라는 조직에 이상할 정도로 신뢰를 보내는 세력은 대체로 비슷한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세상이 범죄자와 선량한 '동료시민'으로 양분된다는 코드가 대표적으로 그것이며, 따라서 동료시민이 검찰을 통해 범죄자를 심판해야 한다는 정서이다. 윤석열을 당선시킨 정서는,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뭉쳐져서 이루어졌다. 조국과 LH 사태는 문재인 정권이 권력을 추구하는 거대한 악임을 보수 지지자들에게 각인시켰고, 따라서 이를 무찌를만한 것은 악을 단죄하는 정의로운 개인인 윤석열과 한동훈이라는 것이라는 정서가 만들어졌다. 실제 공약이나, 정치적인 경력 수준을 보면, 윤석열이 홍준표를 꺾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는데도, 윤석열이 경선에서 승리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홍준표는 스스로만의 문화적 코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윤석열은 한국 사회에 근간으로 깔린 '악을 퇴치하는 선한 공권력'이라는 코드에 탑승해 있었다.
보다 심층적으로 봐야 할 것은, 이런 문화적 코드가 영화를 통해 끝없이 재생산되면서, 일종의 헤게모니를 이룬다는 점이다. 예컨대, 〈살인자ㅇ난감〉을 본 시청자들 중 일부는 사적제재로 살해당한 토건업체 회장을 이재명과 겹쳐보았다. 배우가 이재명과 비슷한 것도 있지만, 사실 근거 없는 추측이 많았다. 정리된 여러 가지 주장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단지 외모만이 비슷해서 이재명과 형 회장을 겹쳐보았을까? 그것은,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거대한 악에 맞서는 선한 자들'에 현재의 윤석열·한동훈-이재명을 끼워 넣어 본 것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했다. 문화매체를 보는 것도 이와 같다. 자연스럽게 권력형 악에 이재명과 민주당을, 반대로 사적제재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는 자들을 윤·한에 맞춰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코드와 정치·사회·경제적인 구조는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지속적으로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맡는다.
윤석열을 예시로 들었다시피, 이러한 헤게모니 재생산은 궁극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확장하는 데 그 목표가 있다. 사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민중이다. 극소수의 개인보다는 수천의 민중들이 역사를 바꾸어왔다. 이런 것은 영화가 안 된다. 〈1987〉은 재밌었지만 대중은 〈서울의 봄〉을 더 많이 봤다. 한국 영화에 잠재되어 있는 여러 영웅 서사는, 권력을 거대한 악으로 규정하면서도, 정작 그 권력에 맞서 싸우는 선과 정의의 세력 역시 검사나 경찰과 같은 '공권력의 일부'로 둠에 따라, 권력과 부에 대한 민중의 근본적인 회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대중은 끝없이 선한 공권력 혹은 선한 영웅 ― 굳이 공권력이 아니더라도 ― 을 갈구하며, 근본적 사회변혁이라는 의제에서 멀어진다. 범죄 소식을 다루는 뉴스 댓글 창이 사적제재와 사형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가득 채워지고, 한동훈을 보고 멋지다는 황당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시피 말이다.
만약 이러한 코드를 극복하거나 대체하지 못한다면, 결국 제2의 윤석열, 제2의 한동훈이 나오지 않겠는가?
지난 17일 국회 본청에서 총선 공약을 되새기는 이재명 대표. 더불어민주당.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점을 떼어놓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현재 야권의 지지자들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코드를 공유하고 있기에 우려가 되는 면도 존재한다. 좌파의 박정희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빨리 김건희를 구속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다. 사람 마음이 어찌 다르겠는가. 나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에서 그치면 결국 윤석열과 한국 사회에 뿌리박힌 검찰독재 헤게모니에서 우리 자신조차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여러 가지 비전을 추가적으로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25만원은 좋은 출발이며, 궁극적으로 내가 즉각 탄핵보다는 4년 중임제 개헌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과거 권력을 단절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향한 희망과 꿈의 메시지도 같이 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22대 국회에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소 거시적인 측면에서, 이런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헤게모니에 장악된 상태에서 새로운 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가? 현재 사회의 모든 문화는 자본주의적 문화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사실은. 다만 그 속에서 우리는 미세하게나마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다른 코드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베테랑〉에서는 재벌에 대한 비판이라는 코드를 도출할 수 있으며, 〈검사외전〉에서는 토건비리와 결탁한 보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도출할 수 있다. 〈범죄도시〉에서도 코인에 매몰된 현 경제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비주류적인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인 문화 감상이 요구되어야 한다. 문화를 볼 때, 그것이 어느 정도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하다고 사료되는 바이다. 그 외에, 내가 생각하는 모든 다른 해결책은 이곳에서 쓸 수 없는 급진적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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