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내가 이 글의 제목과 서문으로 빌려오기 전까지, 레프 트로츠키의 원문은 이랬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내가 하필 이 말을 빌려와 그 주어만 바꾼 것은, 바꾸기 이전의 주어인 전쟁과 내가 택한 주어인 정치 사이에 닮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정치적이며, 세상의 모든 정치는 전쟁과도 같다. 그래서 이 둘 모두는 약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까지 똑 닮았다. 전쟁과 정치에는 우리의 시야를 좁히는 구심력이 있기 때문이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때 카랑탕의 정예 부대들은 그들의 첫 실전에서 훈련한 바를 수행하지 못했다. 선거철 카메라를 켜고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정치인도 출근길에서 만나면 반갑지 않다. 내 출근길의 방해 요소는 피켓을 든 군중만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느껴진다. 오랜 참호전을 겪은 군인들은 총성과 화약 냄새에 무감각해졌다. 이 씁쓸함이 자욱한 전장에서 무언가를 변별해 내기에 우리의 감각은 너무 지쳐있다.
이 순간 권력자들이 바라 마지않았던 우리의 양극화가 시작된다. 우리는 모두 약자가 되기를 두려워한다. 어린 시절 여럿이 하던 놀이에서 소외당한 경험을 쉽게 지울 수 없다. 이 근원적인 공포 앞에서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하는 것, 이기는 편에만 합류하는 것은 일견 솔직하고 합리적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타자화해두는 편이 빠르다. 하지만 두려움이라는 근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카랑탕의 병사들이 그랬듯, 두려움은 항상 경직되어 있고 유연하지 못하다. 이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그러느니 차라리 벌기 쉬운 돈, 얻기 쉬운 행복, 살기 쉬운 삶에 이끌리는 게 편하다. 다양성을 소화하지 못하는 핑계로 바쁘다고는 하지만, 바로 그 편리함의 인력 때문에 정작 투여한 시간 동안 이룰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사회라는 거대한 동역학에서 힘의 논리는 직관적이다. 5000만, 혹은 80억은 인간의 심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숫자다. 가학과 피학의 수요-공급 곡선은 붐비는 시장 참여자들로 인해 보기 좋은 균형을 이룬다. 사디스트들에게 성찰 없이 꿔온 레토릭들은 지배받기 좋아하는 마조히스트들의 안정감이 된다. 그들은 이 꾸며진 평화에 만족한다. 하지만 평화는 안정에 발전이 포함된 보다 큰 개념이다. 피학의 대가로 받는 안정에는 그래서 발전이 없다. 한때나마 이성적이었던 판단은 어느덧 그 근거의 수명을 다해 어떤 것도 진취할 수 없게 하는 족쇄가 된다. 같이 묶여있던 누군가가 밧줄을 푸는 모습에는 합리적인 조소를 건넨다. 이 무력감은 그의 내면에 학습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타인의 마음에 불안감이라는 생채기를 낸다.
“참주들은 그들의 백성들을 가난하게 하는 정책을 펼친다. 이는 날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쏟는 나머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한 예이다. 페이시스트라투스 일족이 올림포스 신전을 건설하게 하는 것도 그 예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5편
비극은 힘을 가진 자들이 이들을 이용하면서 시작된다. 우리는 훈련소에서 빵, 라면, 초코파이, 탄산음료, 걸그룹, 휴가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순하고 온순해진다. '정치는 정치인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양극화가 가짜 평화를 만든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은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손수 주지시키는 정치인은 흔하지 않다.
반면 인과를 탐구하고 성찰하는 원심력으로 평화를 외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변화에 드는 비용을 능력껏 지불하려 한다. 그리고 연대와 협력으로 가용할 능력을 극대화하는 재주도 있다. 이들이 꿈꾸고 실현하는 사회의 신뢰는 손끝끼리 만나는 악수로 시작한다. 악수는 각자의 손에 무기 대신 서로의 손을 쥐는 중세 기사들의 선의 표시로부터 시작됐다. 호의로 함께 보낸 시간이 충분하다면 깍지를 낀다. 맞잡은 손바닥도 필요하다면 팔짱이 된다. 냉전 시기 가장 많은 국가들이 참가(160개국)한 '88 서울 올림픽의 주제곡 〈손에 손 잡고〉처럼 말이다. 이 사회적 신뢰가 이들이 말하는 평화의 근거가 된다. 현관 앞에 두는 택배, 엘리베이터에서 하는 눈인사들... 이들은 이 전쟁의 이전 혹은 와중에도 이와 같은 인간성들을 아낀다. 연대가 이들을 강하게 만든다.
이들에게는 신뢰의 기점이었던 타인에 대한 사려가 마뜩잖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터넷에 칼부림을 예고했다. 철없는 장난에 국가의 행정력이 지불됐다. 몇몇은 실제로 실행했다. 인생이 마음 같지 않아서라고 했다. 연쇄된 '묻지마' 칼부림에 5명이 죽고 32명이 다쳤다. 이 32명의 부상자 중에는 야당의 대표도 포함됐다. 그래서 그 당 대표의 지지자들은 오늘도 두 손을 펴고 그를 껴안는다. 내 손에 당신을 해칠 무기가 없다는 증명과 함께 그들의 대리인을 만난다. 이는 본능적으로 취하는 태세 이상의 지능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태원에서는 159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사고 발생 약 4시간 전인 18시 34분의 신고가 '압사'를 최초로 언급한 뒤에도 그와 같은 112 신고는 경찰이 공개한 것만 11건이 이어졌다. 이 사고를 관할할 용산경찰서 이태원파출소는 사고 현장의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대통령의 영적 멘토는 사고 발생 직후 "좋은 기회를 자꾸 준다. 우리 아이들은 희생을 해도 이래 큰 질량으로 희생을 해야지 세계가 우릴 돌아보게 돼 있다”라고 촌평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 사고를 책임지려하는 어른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책임에 방기된 유가족들의 울음소리가 거슬렸던 이들은 "놀다가 죽은 것이 자랑이냐"라는 조소를 습관처럼 얹고 갔다. 마치 이 나라를 위해 일하다 죽은 청년은 제대로 대우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스무 살의 해병대원은 수해 지역에서 실종자를 구하다 급류에 떠내려갔다. 살아돌아오기 힘든 사지로 그 일병의 등을 떠민 어른들이 있었다. 어떤 전 교수는 언론에 "우연히도 전라도 출신인 1명이 수영을 할 줄 몰라 익사했던 것"이라는 기고를 실었다. 해병대 수사단장은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수사하다 건드리면 안 될 윗선을 넘었다. 그는 '집단항명'의 수괴로 입건되어 보직해임당한 후에 불구속 기소되었다. 그의 고향이 전라도라는 가짜 뉴스는 군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졸업한 포항의 고등학교와 같은 이름의 학교가 광주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북일보에서는 그의 고향을 재확인하고 뒤늦게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만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가 없었다면 이 젊은이의 죽음도 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수처를 폐지하려는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의 심리는 후술한다.
도처에서는 빌라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다. 오피스텔이 사회 초년생을 잡는 통발이 됐다. 계약기간 상 터질 것들은 내년까지 남아있다. 다양한 자리에서 세상과 만나야 할 학생, 청년, 신혼부부들이 그들의 보금자리 또는 그 이상의 것을 잃었다. 인천에서 목숨을 잃은 세 명의 전세사기 피해자는 모두 2·30대였다. 도전에 실패한 대가가 지나치게 큰 사회에서, 도전은 결국 조소의 대상이 된다. 어찌 보면 같은 맥락의 피해자일지 모를 그들의 손가락질은 이제 익숙해졌다.
우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곧 그들의 편이라는 악인들의 믿음은 점점 더 두터워진다. 그들의 행보는 점점 더 과감하고 난폭해진다. 그들이 내가 당사자성을 갖고 있는 어떤 사안에만 숨어있는 나를 마침내 찾아냈을 때, 내 곁에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남아있느냐가 나의 생존을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협력은 진화하고 독단은 도태된다. 다른 곳의 상처 없이 오로지 다리뼈만이 부러져 다른 건강한 개체들의 시체와 함께 발견된 한 선사시대 노인의 유적이 그 증거다. 집단의 유전자는 그의 경험과 지혜가 필요한 순간을 위해 노인을 버리지 않고 봉양하였다. 적자생존의 원리에서 약자를 돌아보는 지능을 가진 종이 바로 적자(適者)다.
얼간이를 뜻하는 영단어 'Idiot'의 어원은 '이디오테스'(Idiotes)라는 고대 그리스 말이다. 이 말은 곧 '정치에 관심 없이 자기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개인의 사적인 이해관계 너머 공동체의 보편적 이익을 생각할 줄 아는 지능을 자유인의 조건으로 봤다. 개인의 무지에 면죄부를 남발하다간 사회 전체에 무지가 번지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 탓이다. 고대 그리스의 참정권이 성인 남성에게만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아마 이 '이디오테스'라는 단어는 정치에 관심을 가질 기회를 자신들이 직접 박탈한 여성들이나, 혹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선천적인 조건을 타고났음에도 사사로운 문제에 천착하는 몇몇 남성들을 조소할 때에 쓰였을 것이다.
이제 그로부터 2000년이 넘게 지났다.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를 말한 지도 그와 같은 시간이 지났지만, 놀다가 죽으면 비웃는 세상에 대책 없이 새로운 생명체를 낳으라는 정치인들이 남아있다. 한 대형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지냈다는 사람은 토론에 나와 "젊은이들이 망친 나라를 노인이 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배가 나오지 않은 아저씨를 데려다 키높이 구두를 신겨놓고 언론에 '조각 미남'이라는 미사여구를 도배하면 20대 여성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 접근했다. "'당한 놈이 얼탔을 게 뻔한' 산업재해에 아깝게 8천만 원까지 줘야 하느냐" 하는 회의의 의제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있다. 30대 신입사원은 더 이상 늦깎이가 아니고, 육아 휴직을 쓰는 남자 부장님도 유별난 것이 아니다. 호칭도 고치고 회식도 줄였다. 재기 넘치는 스타트업들이 전 세대에서 볼 수 없었던 상품과 용역을 공급한다. 젊음의 특권인 생동감 있는 발상들은 우리가 살아갈 새로운 터전이 되고 있다.
변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정치 자영업자들은 해결책이 없는 양비론을 들고나온다. 그것은 패자의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발전 없는 안정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이 돌아올 때마다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는 어떤 행동도 반대한다'라는 성명을 앵무새처럼 내놓는다. 양비론이 아니면 이가 시려도 입술인 북한의 잘못을 덮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 머리 위에 나쁜 정치인이 놀고 있다면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우리는 패자의 언어 앞에 굴하지 않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선택에 대한 책임도, 막연한 두려움도, 하기 부끄러운 인정도 다수의 이름으로는 분담할 수 있다. 우리가 정치를 일상에서 터부시하는 것은 타인과 척을 지기 싫은 우리의 순수한 마음 때문이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정치혐오를 쉽게 참칭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니다.
우리는 탄소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체다. 박애는 이 거대한 동역학 속의 한 객체에서 주체가 될 유일한 방법이다. 관조적이되 염세적이지는 않아야 한다. 비관주의라는 지성의 함정을 한 바퀴 순환해 그 결승선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낙관을 발굴해야 한다. 세상은 인상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인상을 편견이 될 때까지 묵혀두는 실수를 자주 범한다. 우리가 싫어하는 그 무엇이라도 우리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연인이 있는 사람이 우편함 앞에 멈춰 서듯이, 불의를 본 사람은 투표함 앞에 멈춰 서야 한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려 했던 어느 시인의 성정이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슬픔과 분노 없이는 세상의 그 어떤 일부도 선명히 사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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