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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총선과 침묵하는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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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9 20:01
형식
Edito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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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96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미국의 중산층.
『Man and Woman of the Year: The Middle Americans』, TIME. 1970년 1월 5일.
1969년, 68혁명이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지 1년이 지난 해에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은 엉뚱하게도 ‘미국의 중산층’이었다. 전년에 아폴로 8호 우주비행사를 선정한 것과 함께 서구권 보수세력이 68혁명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엉뚱한 사람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미국의 중산층은 사실 68혁명을 노리고 선정된 집단이었다. 타임지는 미국의 중산층을 그해의 인물로 뽑은 이유로, "68혁명이 전미를 휩쓰는 동안, 베트남 종전이나 세계 평화와 같은 여러 이상적 주제가 나왔지만 결국 교외의 수영장과 차고 딸린 집에 사는 4~50대 미국 중산층은 급격한 변화 대신 안정을 택했고, 그들은 닉슨을 대통령으로 뽑았다"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68혁명 당시 전 세계가 변화를 외쳤지만 정작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산층은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투표를 통해 68혁명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1968년의 프랑스 총선과 미국 대선에서 모두 보수파가 승리하면서 68혁명의 급진적 변화가 학생들만의 동란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중산층, 즉 침묵하는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혁명은 혁명으로서 남을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68혁명의 승리는 1990년대, 68혁명에 참여했던 여러 인물들 -대표적으로 빌 클린턴과 리오넬 조스팽- 이 40대와 50대에 접어들고 기업 고위 관료나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68혁명이 표방한 환경주의와 젠더 정치 등을 주류 정치권으로 끌어올렸고, 마찬가지로 68혁명을 겪었던 절대다수의 40대와 50대의 기성세대 및 중산층은 이러한 조치를 지지했다.

II.

만화 〈100도〉의 한 장면. 작가 최규석. “데모 구경이나 해 보지”라는 아버지의 대사.
6월 혁명을 다룬 최규석 작가의 만화 〈100도〉의 한 장면.
1987년 6월 혁명을 다룬 유명한 만화인 〈100도〉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사실 이 만화는 혁명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대신 혁명의 주변부에 있던 기성세대가 어떻게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이 만화에서 가장 명장면이라 할만한 것은 광주 양민을 폭도라고 비난했던 주인공의 아버지가 6월 10일 택시를 타고 가다가 시위 구경이나 하게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생각해 보면 6월 혁명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회사원도 있었고, 노동자도 있었다. 이전의 건국대학교 항쟁이나 5월 광주 민중항쟁과 달리 6.10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성세대가 전두환 정권의 퇴진과 직선제 개헌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 항쟁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몇 달 후, 노동자들이 권리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 대부분의 국민은 침묵했고 노동자 대투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12월의 대선에서 야당의 분열이 있었다지만 국민의 36%는 군부정권의 연장을 지지했고 다른 한편으로 7%는 박정희의 오른팔에 투표했다. 최소한 반수 이상의 국민이 6월 항쟁 이후의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는 아시는 이야기이다. 강남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던 중도파 야당 통일민주당은 삼당 합당을 통해 독재 정권의 부역자를 자처하게 되었고,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으로 이름을 바꾼 독재세력은 과반 의석에 1석 모자라는 의석을 얻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의 대선에서도 김대중 선생은 40%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5년 후 건국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가 찾아왔을 때조차 김대중에 투표하지 않은 국민의 수는 59%에 이르렀다. 단 40만 표만 이회창의 표가 더 많이 나왔다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해의 대선에서도, 40대~50대와 화이트칼라, 대졸자는 이회창을 더 많이 선택했다.
용산 참사 한강로2가 철거 현장.
용산구 한강로2가 철거 현장. 2009년 1월.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더욱 최악인 것은, 김대중조차 6월 항쟁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불가피했겠지만 그의 당인 국민회의에는 민정당 출신 인사도 일부 섞여있었고 무엇보다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박정권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김종필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IMF와 야당의 요구대로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김대중만 하더라도 참으로 힘든데, 김대중이라는 밑바닥의 밑에는 지하실이 있고 거기에는 떨고 있는 약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들은 기륭전자, 까르푸, 쌍용자동차의 부당해고자들이었고 삼풍백화점 유족, 밀양 송전탑 주민, 혹은 천성산 도롱뇽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기성세대와 중산층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대추리 주민들이 죽창을 들고 나섰을 때 언론은 그것을 폭동이라 보도했고, 용산 4구 남일당 빌딩에서 불이 타올랐을 때 사람들은 재개발이 되면 땅값 오른다고 좋아할 사람들이 왜 화염병을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중산층의 정서, 기성세대의 정서, 도덕적 다수를 내세우는 그들의 정서는 어느 한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활 방식이었다. 일제가 심고 간 군대식 상명하복 정신에서 시작되어, 어릴 때는 학교 성적 석차에 따른 차별, 커서는 대학교 학벌에 따른 인맥, 뿌리내린 군사문화가 있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3대 일간지는 이러한 문화를 확대 재생산했고 그것을 한국의 전통으로 정당화하였다. 박정희가 죽은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그의 정신은 결코 전복되지 않았다. 기업이 잘 되어야 노동자도 잘 된다, 기업이 수출을 잘해야 나라가 먹고산다, 우리가 남이가, 학교 동문끼리 잘해주자, 상관이 명령하면 아래 사람은 따른다, 그리고 소소하게는 안전불감증까지. 이것은 정치사상이 아니었다. 하나의 문화였다.
발언하는 노무현을 쳐다보는 이명박.
발언하는 노무현을 쳐다보는 이명박. 2004년 10월 28일.
따라서, 이런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노무현의 지지율은 형편없었다. 그의 지지율은 잘 나와야 35%였고, 2004년 탄핵 정국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지지율이 50% 이상을 넘지 못했다. 이명박은 실패한 노무현의 6월 혁명 문화를 엎는 도덕적 다수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5년간 대통령을 지내면서 이 하나의 생활방식이 그 누구에게도 뽑힐 수 없도록 단단히 뿌리내리고자 했다. 그는 여러 가지 핑계로 정경유착 비리를 저지르거나 방조했고, 국정원을 시켜 여론을 조작했고, 기업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그의 승리는 매우 명확해 보였다. 민주당은 이명박의 지지율 하락에도 대처할 수 없었다. 손학규, 안철수, 한명숙과 같은 자들이 대통령 후보라고 나섰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이명박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III.

2016년 20대 총선 수도권 지역구 결과.
2016년 20대 총선 수도권 지역구 결과. venhekken.
2016년 4월의 총선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새누리당이 180석 이상을 얻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자신했으나 결과는 놀랍게도 민주당이 1석 차이로 1당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123석의 대부분이 중산층이 다수 거주하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에서 참패했음에도 수도권 중산층의 선택을 받아 1당의 자리로 올라섰다. 6개월 후, 중산층은 거리로 나섰고,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노무현의 친구를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으로 올려보냈다.
이러한 '변화'는 겉보기에는 급작스러운 것이었지만 사실 급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덕적 다수, 침묵하는 다수를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할 때 유의미한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점이다. 이전의 기성세대는 나이가 들어서 노년층으로 밀려나고 옛 청년층이 새로운 기성세대로 올라선다. 1986년 건국대학교의 학생들이 45세가 되는 해는 2012년이었다. 그해의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은 극도로 무능한 선거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서 2/3의 의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었다. 홍준표, 권영진 등 주요 정치인이 낙선했고 문재인은 사상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것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은 6월 혁명의 세대가 아니었던 기성세대가 여전히 중산층의 끝물로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수적으로 박정희를 기억하는 자들이 유리했고, 문재인은 대선에서 패배했자. 하지만 그들의 은퇴는 2016년 더욱 가시화되었고 총선의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김어준과 주진우. 무죄를 선고받은 법원 앞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어준과 주진우. 2015년 1월 16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문화 역시 여러 가지 요건으로 변화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20대였던 1960·70년대생은 이전 세대와 달리 조선일보와 김대중 주필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이전 세대와 달리 6.25 전쟁을 겪지 않았고 베트남 파병도 겪지 않았으며 정권과 대기업이 함께 상부상조해야 한다는 구세대의 논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새로운 미디어 공급자로 등장한 김어준, 주진우 등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이전의 군사식 문화를 증오했으며, 대기업이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인터넷 등 새 미디어의 발달로 기존 종이, 텔레비전 미디어의 영향력이 쇠퇴했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그들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물밑 장소는 확대되었다. 2012년 대선 때 김용민과 같은 팟캐스트 방송가들이 공천된 것은 그러한 새로운 문화, 삶의 방식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여전히 끝물에 남아있던 구세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민주통합당은 패배했다.
2016년과 2017년을 거치면서, 새로운 문화와 정서를 견지하는 1987년~1997년의 세대가 가정을 꾸리고 중산층으로 진입하였으며, 때맞춰 터진 대규모 스캔들로 정·경·언·검 유착의 폐해가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사회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한나라당과 민주자유당을 지지했던 구세대가 60대와 70대로 밀려나면서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반면, 새로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된 40대와 50대는 1987년 군사정권의 폭압과 우루과이 라운드를 기억하던 세대였다. 한편으로 향후 10년 이내 새로운 중산층으로 도약할 30대는 이명박의 살인적인 등록금 폭탄과 FTA를 경험한 세대이다. 이 모든 것이 겹쳐져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중산층의 요람 경기도의 교외에서 분당구 갑을 제외한 모든 선거구를 석권했다. 중산층의 도시인 동탄에서 민주당은 60%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모든 구시대 세력이 연합해 이재명을 파괴하고자 한 2022년 대선에서도 이재명은 단 0.7%p 차이로 석패했다. 세력 구도가 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증거로, 민주당은 이전까지 사회적 정의를 내세웠다. 경제, 안보 등의 가치는 보수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재명의 슬로건은 유능한 경제 대통령이었고 반대로 보수주의자 윤석열의 슬로건이 공정과 사회정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 구도적 주도권(=20년 전의 한나라당)을 중산층 진보가 쥐고, 이에 맞서 상대적으로 빈약한 유권자 그룹을 엮어 한탕을 노리는 세력(=20년 전의 열린우리당)을 보수가 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번 민주당 출마자들도 보면 그러하다. 경제적으로 우리 당은 이제 현대자동차 회장을 공천할 수 있는 당이다. 한미연합부사령관이 우리 당의 남양주시 국회의원 후보이다. 강서구청장은 경찰 출신이다. 이제 우리 더불어민주당은 보수에서 떨어진 조각을 주우며 열심히 노력하던 국민회의가 아니다. 사회정의는 물론 경제, 안보, 치안, 행정, 환경,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보수를 실력으로 압도하고 있다. 이제 민주당이 주류이다. 국민의힘은 비주류이다. 마치 2006년 한나라당이 사회적 주류였고 열린우리당이 비주류였다시피...

IV.

글을 마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중산층적인 삶의 형태... 이것은 이제 보수보다는 진보가 더 공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한다. 40대와 50대가 조국을 지지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 대한 도덕적 부채감을 조국에 겹쳐본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본 해석은 3~50대 세대가 조국의 "가정"에 연민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란한 가정을 파괴한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를 의미한다. 핵심만 추리자면, 진보좌파가 교외 아파트에 거주하는 화목한 가정이라는 전형적인 "중산층적 삶의 형태"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가 크게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래, 87년의 대학생들이 이제는 가정을 꾸렸구나. 그들의 아이가 커서 이제는 대학교에 들어갔구나. 그런 삶을 살고, 그런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에 조국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87학번인 우리 아버지는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그날 정문에 서있었다. 그도 결혼을 했고, 나를 낳았고, 분당으로 이사해 사업을 했고, 이제 50대가 되었다. 그는 4월 민주당의 지역구 후보와 민주연합 비례 명단에 투표할 것이다. 그의 아들인 나는 이번에 인생 첫 투표로 그와 같은 후보에 투표할 것이다.
물론, 윤석열과 그의 지지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보수에 대한 국민의 열광이 뜨겁다고 말한다. 그들은 170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저에는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 침묵하는 다수의 심리는 동일하다. 그들은 사회적 안정을 바란다. 보편적인 도덕을 믿는다. 오늘날의 사회적 안정은 문재인의 선진국이며, 보편적인 도덕은 사회적 연대이다. 윤석열의 논리인 냉소주의와 승자독식주의, 자유방임주의가 설 곳은 이제 없다.
나는 침묵하는 다수를 맹목적으로 혐오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들이 역사에서 승리의 편에 속했다는 것만을 안다. 이것은 가치중립적인 표현이다. 그들은 1968년, 혁명을 패배시켰고 닉슨과 퐁피두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932년의 침묵하는 다수는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대통령인 루스벨트를 선출해냈다. 1860년의 침묵하는 다수는 노예제 폐지를 명령했다. 즉, 침묵하는 다수가 정의의 편에 설 때 그들은 그 어떤 말보다도 강력했고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로웠다. 나는 그러한 힘을 믿는다. 보편적 사회정의를 지향하고 현 정권의 불의와 독재를 타도하는 침묵하는 다수가 4월의 총선에서 승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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