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 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
목차
1.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2.
세계의 근본 문제
3.
인간과 사회
4.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Ⅰ)
5.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6.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7.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Ⅱ)
8.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9.
에필로그
서평
─ Frieren
어떤 독자들에게는 '야매 철학자 책'으로 매도당한 책이다. 총 93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자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재야 철학자이자 마르크스 해설로 유명한 강유원 교수 저작이다. "마르크스를 추종하지는 않지만, 인용한다"라는 강 교수의 신념대로 책에 흐르는 유물(唯物)주의적인 시각을 느낄 수 있다.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이 세계를 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가 책에 담긴다는 것이다. 강유원은 해당 책에서 역사를 수놓은 많은 고전들이 그 자체로서 신성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제로는 그 고전이 쓰인 시대의 여러 물질적, 문화적, 물질적, 특히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음을 풀이한다.
글쓴이는 중세 기독교 고전의 등장에 특별한 신성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강유원에 따르면 중세 기독교 신앙은 로마제국 해체 이후 각 지역의 단절을 극복하게 한 11세기 경의 온난한 기후였다. 풍족해진 작황은 각 지역의 물류 이동을 활발히 했고, 그동안 정체되었던 지식 이동 역시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토마스주의가 발달했다. 13세기의 혹한기는 지식의 성장을 정체시켰고, 대학을 학문 연구의 중심지가 아닌 정치화된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결국 마키아벨리와 같은 세속적 정치학자들이 등장했다. 강유원 교수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우리가 이른바 고전이라고 부르는 대상에는 정신적인 숭고함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특정 시대의 물적 토대에서 비롯된 상부구조에 불과함을 주장한다.
주목해 볼 만한 부분은 매체에 대한 논의이다. 매체는 텍스트를 담는 그릇이지만 때로는 그릇이 어떤 것이 담길지를 결정하기도 하는 법. 여기서도 강 교수 특유의 뒤집어 생각하는 면이 드러난다. 강유원 교수나 최근에 내가 주목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키틀러 등은 매체가 그 내용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 역시 그 매체의 특성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강 교수의 설명에 따르자면, 과거 수메르 시대에는 점토판에 문자를 새겼고, 새겨질 수 있는 문자는 극히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되었다. 우리가 수메르 문명의 서사시를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정치·경제적인 면이 이러한 매체의 형식에 영향을 미침도 명확히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는 대량생산되어 대량유통될 수 있었지만 왕조의 독점으로 인하여 역시나 그 매체가 담는 텍스트는 신화로 국한되었다.
아무튼, 강유원 교수는 이렇듯 경제적, 물적 기반 위에서 발전한 고전이 담을 수 있는 자연의 목표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음을 선포한다. 카를 마르크스와 지크문트 프로이트, 찰스 다윈이 말했듯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어떠한 숭고한 정신적 목표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물질적인 것 위에서만 움직일 뿐이다. 그런데, 과거의 고전도 이를 알고 있었다. 과거에 살아간 수많은 수메르인들은 과학적, 철학적인 통찰 없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결국 무목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수천 년에 걸친 여로를 통해 다시 깨닫는다. 이 얼마나 허망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할까? 책이 세계를 담지 않고, 세계가 책을 담는다면, 우리는 굳이 고전을 통하여 새로이 세계를 통찰해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2024.04.24.
저자에 대해
강유원 철학자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 받음.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는 『책』, 『서양문명의 기반 : 철학적 탐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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